▲ ‘블록체인 기술’이 데이터 위변조가 어려운 점 등으로 각광받는 가운데 시중은행도 블록체인 유통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사진 = 이미지투데이
블록체인은 식별, 암호화 및 거래 정보를 포함하는 기본 데이터 단위인 ‘블록’에 데이터를 담아 체인 형태로 연결한 분산형 데이터 저장 기술이다. 수많은 컴퓨터에 이를 복제해놨기 때문에 ‘공공 거래 장부’라고도 부른다. 중앙 집중형 서버에 거래 기록을 보관하지 않고 거래 참여자 모두에게 거래 내역을 보내준다. 거래 때마다 모든 거래 참여자가 해당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데이터 위조나 변조를 방지할 수 있다.
시중은행도 블록체인 플랫폼 구축 등 유통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한국은행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기본 기능 작동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현금 없는 사회’에 한 발짝 더 다가섰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부터 제조·발행·유통에 이르는 단계별 실험을 진행했는데,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올해 상반기부터 결제에 초점을 맞춘 2단계 실험에 들어간다. CBDC로 대체 불가능 토큰(NFT)나 디지털 예술품을 구매해 볼 계획이다. 국가 간 CBDC 송금 가능 여부도 살펴보고 인터넷 연결이 안 되는 상황에서 근거리 무선통신(NFC) 기술로 송금이 가능한지도 점검하려 한다. 유희준 한국은행 디지털화폐기술반장은 “통신사 장애나 자연재해로 민간의 지급 결제 기능이 마비될 경우 실물 화폐와 함께 지급수단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CBDC는 무형의 온라인 화폐로서 국가 화폐 단위를 그대로 사용한다. 은행 계좌가 필요한 모바일이나 온라인 결제와 달리 은행과 같은 금융사를 중간에 거치지 않고 개인 간 전자지갑(디지털 화폐 저장 프로그램)을 통해 돈을 주고받을 수 있다. 효력은 지폐와 동일하다.
현재 각국 중앙은행은 현금 사용 감소와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 등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고자 CBDC 연구에 속도를 내고 있다. 비트코인 같은 가상 자산에 맞서 독점적인 화폐 발행기관 권위를 지켜야 한다는 차원의 이유도 있다. 지난해 국제결제은행(BIS)이 CBDC 사용 현황을 조사했는데, 조사에 응한 65개국 중앙은행 중 86%가 CBDC 연구 또는 검증을 진행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한국은행은 현재 CBDC 발행 계획은 없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CBDC 연구 전담팀을 만들어 실험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 CBDC 체제로 급속하게 전환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한국은행이 지난 2일 발간한 ‘중앙은행 CBDC 주요 이슈별 글로벌 논의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CBDC 도입 논의가 활성화하는 배경은 ▲현금 이용 감소 ▲경제의 디지털 전환 가속화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의 시장 지배력과 데이터 집중 ▲스테이블코인(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암호 화폐) 등장 등 금융 환경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기 때문으로 꼽힌다.
현재 CBDC를 정식으로 통용하고 있는 국가는 바하마, 나이지리아, 동카리브해 7국 연합 등이다. 주로 온라인 지급 결제 능력이 부족한 나라가 대체용으로 CBDC를 활용하는 모양새다. 주요국 가운데는 중국이 2020년부터 선전, 쑤저우 등 10여 개 도시에 CBDC를 시범 운영하는 등 선두를 달리고 있고, 미국과 유럽 연합(EU) 등 선진국이 뒤쫓아가고 있다. 다만, 모든 중앙은행이 CBDC 도입이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고 실제 발행한다 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데다가 국제 표준도 마련돼 있지 않아 한국은행은 CBDC 발행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 중이다.
KB국민은행(이재근)은 지난해 연말 금융권 최초로 CBDC를 보관하고 관리할 수 있는 디지털 지갑을 개발했다. 블록체인 플랫폼 ‘클레이튼(Klaytn)’ 기반의 디지털 지갑은 CBDC 외에도 가상 자산, 지역화폐, NFT 등 다양한 디지털 자산의 충전, 송금, 결제 등이 가능하도록 구현됐다.
지난 2020년 11월에는 블록체인 기술 기업 해치랩스(대표 문건기)와 블록체인 투자사 해시드(대표 김서준)가 공동으로 한국디지털에셋(KODA, 대표 이사 김현모·김종인)를 설립했다. 그 뒤 신한은행도 코빗과 블로코 등이 설립한 가상 자산 커스터디사 한국디지털자산수탁(KDAC 대표 김준홍)에 전략적 투자를 진행했고, KODA와 KDAC은 지난해 12월 공식 가상 자산 사업자로 자리 잡았다.
신한은행(은행장 진옥동)은 지난해 3월 한국은행의 CBDC 발행에 대비해 LG CNS(대표 김영섭)와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화폐 플랫폼의 시범 구축을 완료했다. 현재는 블록체인 기술을 기으로 디지털 신사업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크게는 ▲블록체인 컨소시엄 참여 ▲금융과 블록체인 접목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발굴 등 3가지 방향이다.
최근 KT(대표 구현모)와 지분 맞교환을 통해 9000억원 규모 ‘디지털 혈맹’ 관계를 구축한 것 또한 미래 디지털 신사업을 추진하려는 두 회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풀이된다. 양사는 NFT를 기반으로 디지털 자산 발행 및 거래 플랫폼을 구축하는 공동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하나은행(은행장 박성호)는 지난해 포스텍 크립토블록체인연구센터(센터장 홍원기&·우종수)와 맞손을 잡고 CBDC 기술 검증을 마쳤다. 2020년 연말에는 블록체인 기반 자금 중개 서비스와 고속도로 통행료 미납 납부·환불 신청 서비스를 잇따라 출시하기도 했다. 모바일뱅킹 ‘하나원큐’에 신설되는 고속도로 통행료 관련 메뉴에서 본인 명의 차량번호만 입력하면 간편하게 미납 통행료 조회·납부와 환불 통행료 조회·입금 신청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다.
우리은행(은행장 권광석)은 지난달 27일부터 행정안전부(장관 전해철), 한국조폐공사(대표 반장식)와 함께 정부 발행 공식 디지털 신분증으로 블록체인 DID(Decentralized Identity, 분산 신원 증명) 기술이 적용된 모바일 운전면허증을 시범 발급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디지털 정부 혁신 추진 계획과 디지털 뉴딜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모바일 운전면허증은 블록체인 기술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 데이터 위·변조가 불가능하고 개인의 판단에 따라 필요한 정보만 선택해 제공한다. 실물 운전면허증 없이도 지점 등에서 대면으로 실명 확인이 가능하다.
지난달 6일에는 디지털 신기술 서비스 기반이자 안정적이고 확장 가능한 오픈소스 네트워크 ‘블록체인 플랫폼’을 개설했다. 블록체인 플랫폼은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결제, 인증, 자산 관리 등에 있어 개인 정보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거래 신뢰성과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는 네트워크 환경이다. 앞서 우리은행은 지난해 12월 블록체인 플랫폼 업무를 전담하는 ‘혁신기술사업부’를 신설했다.
이번 블록체인 플랫폼 구축으로 한국은행의 CBDC 모의실험연구 민간 기관 유통을 위한 기술 검증을 완료했다. 올 하반기 CBDC 유통 확대 실험에 대응할 방침이다.
NH농협은행(은행장 권준학)도 지난해 디지털 자산 위탁관리 합작법인 ‘카르도(Cardo&·대표 노진우)’를 설립해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다. 카르도는 농협은행이 블록체인 기술 기업 헥스란트와 핀테크 상장사들과 함께 만든 합작법인이다.
다만, 파트너사의 사업 신고 절차로 인해 사업 진행에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이 가상 자산 수탁업 진출을 위해 손잡은 기업들이 전부 지난해 금융당국의 가상 자산 사업자 신고 심사를 통과한 데 반해 농협은행이 지분 투자를 단행한 ‘카르도’는 유보 결정을 받았다. 하지만 금융당국이 지난달 재심사 과정을 거치며 관련 인력을 충원, 신고 수리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숨을 고를 수 있게 됐다.
앞으로 블록체인을 활용한 시중은행 사업은 더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앞으로 은행권은 가상 자산 수탁을 넘어 자금세탁 방지, 장외거래(OTC), 실제 가상 자산 제작 등 가상 자산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할 것으로 보인다”며 “이러한 발 빠른 움직임은 플랫폼 중심으로 디지털 고객을 꽉 쥐고 있는 빅테크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임지윤 기자 dlawldbs20@fntimes.com